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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신학원 수업을 하는데,
예상대로 엄청난 질문이 쏟아져 아예 수업을 그렇게 하였습니다.


문) 저는 교회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갔으면 좋겠어요.

답)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왼쪽인가요? 누가 그렇게 얘기하나요? 언론보도에서 보신 거죠?

(예...) 박신부님 강론 전문 읽어보신 분 손 좀 들어보시겠어요? (아무도 안 계셨다)

결국 우리가 접한 것은 신부님의 강론이 아니라, 언론의 보도입니다. 남의 창으로 보았지요.
그런데 그 언론들은 정부 편이란 말이지요. 박신부님의 강론 전문을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문) 강론의 요지가 뭐였습니까?

답) 부당한 권력과 잘못된 재물이 인권을 침해한다는 내용의 말씀이었죠.
또, 부정 선거에 대한 말씀도 하셨구요.
댓글 조작과 개표 의혹이 두 가지의 커다란 사안인데, 개표 의혹에 대해서는
차치하고라도 이미 드러난 댓글 조작에 대해서만이라도 엄정히 수사하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 사안을 수사하던 검찰총장을, 혼외자식 의혹을 제기하면서 끄집어 내렸잖아요?
국민들은 제대로 수사하라고 서울에서 21차례나 촛불 집회를 했는데, 단 한번도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한 적이 없잖아요?
이미 촛불 집회에서 '하야' 얘기는 나왔지만,
아무도 시비 걸지 않았습니다. 왜? 보도를 안 했으니까요. 청와대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쌍용차 해고자들을 위한 미사가 대한문에서 225 차례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언론은 침묵했고, 청와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쎄게" 말씀하신거예요. 반응 좀 보이라고.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거면 차라리 내려 오라고. 그러니까 반응을 보였네요.
매우 열광적인 반응을.

전체 강론 20분 중 연평도 얘기는 3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분만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곡해해서 다뤘지요.

박신부님 말씀은 북한 인근 해역에서 한미 군사 훈련으로 북한을 자극해서
연평도 포격이 일어났고, 정부는 그것을 선거에 이용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 중 일부 내용을 조각내어 뒤집어 씌운 거지요.

문) 그래도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답)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책이 있는데, 복음적 시각으로 사회 문제를 식별하고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교황청 문헌을 모은 것입니다. 간추렸는데도 612쪽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책 전체가 '교회는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가톨릭 교회교리서도 사회교리 항목을 따로 다루고 있고, 대사회적인 문제를 엄청나게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리가 아닌 줄 압니다. 말하자면 '개인 교리'만 '교리'이고,
'사회 교리'는 '교리'가 아닌 줄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 그래도 성직자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항목이 교리서에 있다는 데요?

답) 가톨릭교회교리서 2442항에 "정치 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항목의 뜻은 가령 국회의원에
출마하거나 장관을 맡는 등, 공직이나 정당, 노조에 가입하여 활동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발언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시 정치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성직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김수환 추기경님이요?)

예. 우리나라에서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꼽을 수 있지요.
하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정치에 깊이 관여하신 분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입니다.
폴란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해체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하셨죠. 이를 위해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아주 긴밀히
협력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정치에 관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모름...)

교황님의 행보가 자신들의 가치관과 맞았기 때문이죠.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타당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박신부님 강론에 대해서는 왜 '정치에 관여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강론이 나의 가치관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솔직해지면 좋겠습니다.

'나는 박근혜가 좋다. 그래서 박신부님의 강론이 마음에 안 든다'
이게 솔직한 발언입니다. 박신부님의 강론이 지나친 정치 개입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요한 바오로 2세와 성모님께도 뭐라고 하세요.


문) 성모님은 왜요?

답)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그것은 정치 개입 아닌가요? 파티마의 신심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은
공산 정권이 무너지는데에 성모님의 전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성모님의 메시지와 전구는 '대단히 정치적인' 사안입니다.

우리가 '정치'를 나쁜 단어로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정치는 더럽습니다. 왜 더러울까요?
그리스도교인들이 복음적인 정신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정치를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복음적인 정신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2천년의 그리스도교 역사상, 교회는 항상 정치(사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을 맺어왔습니다.
리차드 니버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다섯 가지 방식으로 분류했습니다.

1) Christ against culture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사회에 대적하는 교회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이는 박해시대 때의 자세입니다.
사회(문화)가 커다란 악의 세력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에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박해가 끝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획득했을 때 나타난 것이
2) Christ of culture 입니다. 문화 속의 그리스도. 세속 사회에 속한 교회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아주 타락한 교회를 유발했습니다. 세속의 가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켰습니다.
세속의 질서가 한없이 선한 것이라고 보았거든요.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 역시
이러한 비판을 받았고, 이것이 나치즘을 정당화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3)의 모델은 2)를 보완한 Christ above culture 입니다.
문화 위의 그리스도입니다. 세속 문화는 선하기는 하되, 완전하지는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복음의 빛으로 완성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입니다.
이 모델은 문화를 3)보다는 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세속 질서와 교회가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을
세상이 언제나 수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 모델은 Christ, the transformer of the culture 입니다.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4)와 비슷하면서도 변혁이 현재에 일어나는가,
미래에 일어나는가가 차이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모델 중,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모델은 몇 번일까요?

예. 두번째 모델 밖에 없습니다.
세속 질서가 선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델을 따를 때 교회가 가장 타락했습니다.

나머지 1) 3) 4) 5) 는 문화 (사회) 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았고, 복음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에 대해 관여를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섯 모델 중
어떤 모델이 가장 좋은 모델일까요?

(4번이나 5번이 아닐까요?)

그때 그때 달라요.

아니, 정말입니다. 그때 그때 달라요. 지금이 박해시대라면 1번으로 가야겠지요.
그렇지만, 박해시대가 아니라면 3)이나 4)나 5)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입장을 어떻게 취하느냐, 지금의 문화를 어떻게 식별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지금의 문화가 선하다고 보면 3)인 거고, 문제가 있다고 보면 4)나 5)입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저항해야지요.

지금의 문화가 어떤 문화입니까? 소비자본주의 문화, 돈의 문화입니다.
돈이 하느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하는게 지금 이 시대의 문화입니다.
전지전능성을 돈이 차지하려고 하고 있어요.

여러분 중에는 이명박을 찍은 분도 계실거고, 안 찍은 분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국민들이 이명박을 찍을 때 어떤 기준이었습니까?
그분이 인품이 훌륭하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봐줄 것 같아서 찍었습니까?
그분의 인품에 반해서 찍으셨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국민들이 '부자 되게 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찍은 것 아닙니까?

대체 '모두가 부자가 된다'는 것처럼 허황된 말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부자는 상대적인 개념인데, 남들보다 돈이 많은게 부자인데,
모두가 부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부자된다'는 말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나요?
제 기억으로는 BC 카드 광고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멘트가 나오기 전까지
'부자 되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은밀하고 부끄러운 욕망이었습니다.
'먹고 살면 된다'는 것과 말이 다릅니다.
'남들보다 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고,
이건 남들에게 드러내기 민망한 욕망이었습니다. 성적인 욕망처럼.

성적인 욕망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뭐라고 부르나요?
변태, 바바리맨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부자 되겠다는 욕망을 이제는
너도 나도 드러내 놓습니다. 예전에 개업을 하면 리본에 "축 발전"이라고 쓴
화분을 주었는데, 이제는 "대박 나세요"라는 문구가 더 많이 보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려하고 있고,
돈을 위해서라면 부정과 부패도 눈감으려는 세상이 되려하고 있습니다.
'나만 잘 살게 해 주면, 그 사람이 부정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이런 가치관 때문에,
지금 나라의 가장 큰 선거가 거대한 부정 속에 저질러졌는데도 침묵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복음의 정신으로 볼 때 타당한 일입니까?

복음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입니까?

문) 그래도 정권의 회개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면 안 되었을까요?

답) 모여서 기도했잖아요. 그게 시국미사잖아요.
그간 여러 차례 각 교구에서 시국미사가 있었고,
서울광장에서는 전국 단위의 시국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정권이,
미사 강론 중 센 이야기를 할 것 같으니까 와서 들은 거지요.
그리고 그걸 퍼 나른 거지요. 언론에서 대서 특필한 거죠.

신부님들과 교우들은 성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청와대에 가서 돌 던진 게 아니예요.
그런데 이를 두고 "용납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고, 군복 입은 어른들이 와서 성당을
부수겠다고 협박하고 명동 성당에 폭발물 설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대체 누가 더 폭력적인 겁니까?


문) 그래도 저희는 좀 조용히 신앙 생활 했으면 좋겠어요.
교회가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뉴스보고 성당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답) 아까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은 어떤 입장이셨나요?
오늘날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지금 여러분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 신앙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질문을 받고 계신 겁니다.

요즈음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흔들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뒤흔들고 계신데, 묵주기도 5단 더 하고, 10단 더 하고,
그걸로 내 신앙의 자세가 끝나는 것일까요? 빛의 신비에서 묵상하고 있는 바가,
고통의 신비에서 묵상하고 있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요? 세상과 상관 없는 신비들인가요?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질문 받고 계신 겁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출처: 대전교구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의 페이스북 (http://on.fb.me/1864A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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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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